사려니<부부상담사>

북한과 중국의 접경 지역을 둘러보고 왔다. 여행은 코앞에서 두만강을 보는 것으로 시작해 압록강에 발을 담그는 것으로 끝났다. 두만강~ 푸른 물에~ 노 젓는 뱃사공. 두만강은 노랫말처럼 푸르지 않았다. 누렇고 폭이 좁았다. 내가 헤엄쳐 건널 수 있을 정도였다. 구글 지도에는 강에 경계선이 그려져 있다는데 실상 강에는 국경이 없다고 했다. 북한과 중국 사람은 누구나 강을 공유하며 이쪽저쪽을 오간다고 했다.
버스로 이동하는 내내 창밖으로 드넓은 벌판이 펼쳐졌다. 봉오동 전투와 청산리 전투를 치른 독립군이 행진하였고 전 재산을 팔아 신흥무관학교를 세운 이회영 일가가 나라를 구하기 위해 이동해 간 벌판이었다. 그 벌판 위로 옥수수밭이 끝없이 이어졌다. 용정에 있는 한적한 공동묘지 옆에도 옥수수가 심겨 있었다. 그 묘지에는 윤동주와 그의 사촌 형 송몽규가 누워 있었다. 윤동주 묘비에 ‘조선족’ 시인이라고 적혀 있었다. 묘한 반발심이 일었다. 그러나 여행 끝무렵에 나는 비로소 이해하게 되었다. 아주 오래전부터 우리 민족이 살아온 만주 지역은 지금중국 땅으로 조선족 문화 또한 이제 자기들 것이었다. 조선족은 우리 민족이지만 중국인이었다. 그래서 한복도 비빔밥도 자기들 거라고 우길 수 있는 거였다. 접안 새벽 시장에서 떡메치는 사람도 한복을 입고 있었다.
둘째 날 꼭두새벽에 백두산으로 향했다. 길옆으로 자작나무 숲이 이어졌으나 어두워서 잘 보이지 않았다. 차가 선 지점에서부터 계단이 이어졌다. 그 끝에 천지가 있었다. 왈칵 눈물이 나오려고 했다. 조금 기다리니 해가 떠올랐다. 뜨는 해를 보며 빌었다. 아이가 자기 과업을 잘마칠 수 있게 해주세요. 좋은 곳에 취업할 수 있게 해주세요. 남편이 지금처럼 건강하게 해주세요. 내가 글을 잘 쓰게 해주세요. 그 짧은 순간에 ‘해주세요, 해주세요’를 남발하다 문득 깨달았다. 여기까지 와서도 지밖에 모르는구나. 옥수수가 심어진 벌판을 걸어간 사람들이 떠올랐다. 걸핏하면 전쟁의 위협에 시달리는 한반도가 머릿속을 스쳤다. 나는 죄스러운 마음으로 기도했다. 우리 민족에게 힘을 주세요. 우리 민족에게 지혜를 주세요.
솔직히 말하자면 나는 압록강과 두만강의 위치도 모르고 있었다. 백두산을 중심으로 동해로 흐르는 게 압록강이고 서해로 흐르는 게 두만강이라는 걸 알지 못했다. 게다가 압록강과 두만강 너머로는 제대로 생각해 본 적조차 없었다. 사고가 압록강과 두만강 이남으로 국한되어 있었다고 할까. 그러나 조금만 생각해 보면 아득한 그 옛날부터 지금까지 만주 사람들은 국적에 상관없이 접경 지역에서 한데 섞여 살았다. 독일과 프랑스, 프랑스와 스위스, 스위스와 이탈리아의 여느 접경 지역처럼. 그래서 윤동주도 거기서 태어났고 독립군과 이회영도 거기에 근거를 두고 활동한 것이었다.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우리가 첫 저녁을 먹은 식당에서 일하는 젊은 여성도 북한 노동자였다고 했다. 북한에서 자란 화교도 있고 중국에서 자란 북한 사람도 있다고 했다.
3박 4일의 이번 여정으로 나는 ‘만주 벌판을 보았다.’ 아니 발견했다. 우리 기억에서 사라진 땅, 거기에 묻힌 우리 민족의 서사에 대한 감각이 내 안에서 움텄다. 발해에서 고구려, 고려, 조선, 일본 제국주의 점령기에서 지금까지 만주 벌판에서 살다 간 사람들을 기억하고 싶어졌다. 그 지역의 영웅들을 당시의 역사와 함께 정리해 기록으로 남기고 싶어졌다.
만주 벌판의 옥수수는 크고 알이 굵었다. 탱글탱글 식감이 좋았다. 그래서 나는 끼니마다 옥수수를 먹었다. 독립군이 말을 타고 달리던 만주 벌판에도 옥수수가 지천이었는지는 모르겠다. 그래도 앞으로는 옥수수를 앞에 두면 윤동주와 이회영, 이름조차 남기지 못한 수많은 독립군이 떠오를 거라는 건 알겠다. 내 머리에 옥수수 하면 만주라는 조건 반사 회로가 만들어 진 것이다.
만주를 떠나오던 날 압록강에 발을 담그고 거기에 내 약속을 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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