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근원<동화작가>

하지감자를 찜통에 넣고 찐다. 햇감자 익어가는 냄새에 벌써 배가 불러오는 듯한 느낌이다. ‘이 감자는 어느 곳에서 햇볕과 영양분을 가득 받고 나에게까지 왔을까?’
이맘때 하지감자가 나올 때면 단골손님처럼 떠오르는 선생님이 있다.
중학교 2학년, 경상도와 강원도 사투리를 심하게 섞어 쓰는 국어 선생님. 5월 어버이날 무렵이 되면, 선생님은 교과서를 덮고 세상에서 제일 아름답고 슬픈 감자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자주감자 꽃 피는 소만 절기가 되면, 늘 뱃속에선 시냇물 흐르는 소리가 나곤 했제. 찔레순과 아까시꽃을 볼이 터져라 우물거려도 십 리 학교길은 늘 배가 고팠제. 그럴 때 듣는 뻐꾹새 울음소리는 슬몃 눈물까지 나오게 했제. 누렇게 익어가는 보리밭에서 우리는 늘 되지도 않는 이야길 지절지절대곤 했제. 보리가 쌀이라면, 보리가 쌀이라면 얼마나 좋을꼬. 굽이굽이 대관령보다 넘기 더 힘들었던 보릿고개, 그 힘든 고개를 자주감자가 아슬아슬 넘게 해주곤 했제. 그러던 어느 해, 토실토실 분내 나는 하얀 감자 맛을 본 후 자주감자가 얼마나 맛이 없다는 걸 알게 되었제. 하얀 감자가 자주감자와 듬성듬성 섞여 나오는 식탁에서 형제들끼리조차 다툼이 일어나곤 했제. 그럴 때마다 어머니는 우리에게 공평하게 하얀 감자를 나누어 주곤 어머니는 자주감자만 먹었제. 자주감자는 단골손님처럼 늘 어머니의 몫이 되고 말았제. 이상도 하지? 맛없는 자주감자를 어머니는 저리도 맛있게 먹을까? 어른이 되면, 자주감자도 맛있어지는 걸까? 어머니의 자주감자 먹는 모습을 볼 때마다 빨리 어른이 되고 싶었제. 물 같은 세월은 많은 변화를 겪게 만들며 흘러갔제. 보릿고개도 없어지고 자주감자도 하얀 감자에 밀려 보기 어렵게 되었제. 흐르는 세월 속에 선생님은 결혼을 하고, 이이를 낳아 기르면서 그제야 어머니의 마음을 깨닫게 되었제. 감자 꽃 피는 소만 절기가 돌아오고 뻐꾹뻐꾹 뻐꾹새가 울면 어머니의 목소리를 가슴 저미도록 듣게 되었제.
“그래, 엄마는 하얀 감자보다 자주감자가 더 맛있제. 너희들은 하얀 감자 많이 먹으려므나.”
철없던 까까머리 시절, 우리는 국어 선생님을 보고 ‘자주감자’라고 소곤대며 웃곤 했었다. 감자를 보면 떠오르는 선생님에게 속죄의 마음을 보내지만, 이 세상 분이 아니다.
하지감자는 이른 봄에 파종하여 장마가 시작되기 전에 수확해야 한다. 여름의 시작과 함께 음식과 간식으로 중요한 먹거리이다. 맛과 영양가가 뛰어나고 부드러운 식감과 달콤한 맛은 엄지손가락을 꼽을만하다. 벼, 밀, 옥수수와 함께 세계 4대 작물에 해당한다. 또한, 고구마, 옥수수, 매밀 등과 함께 대표적인 구황작물로 인류를 기아의 어둠에서 구제한 고마운 작물이기도 하다.
감자는 남미가 원산지이다. 우리나라에 감자가 들어온 때는 청나라를 통해 1824년 조선 순조 때였다고 한다. 척박한 환경에서도 잘 자라, 보릿고개가 심하던 시절 구황작물 역할을 톡톡히 해냈다. 그런 감자가 이제는 씨감자 생산 기술이 크게 발전하면서 원산지인 남미로까지 역수출까지 하게 되었다.
감자밥, 감자송편 감자수제비, 감자범벅, 감자조림, 감자옹심이 등 어떤 음식보다 영양학적으로도 뒤지질 않는다. 그야말로 건강식이다.
그런 고마운 감자를 뉴스에서 툭하면 ‘뜨거운 감자’라며 비하 발언을 하고 있다.
‘뜨거운 감자’는 미국에서 유래되었다. 감자는 미국인들의 식단에서 빼놓을 수 없는 식품이다. 갓 구운 뜨거운 감자를 자칫 손으로 집다가는 데일 수 있다. 뜨거운 기색을 감추고 있는 감자를 한 입 넣으면 어떻게 될까? 목구멍이 뜨거워 뱉을 수도 그냥 삼킬 수도 없는 심각한 상황에 빠지고 만다. 인간관계에서 그런 상황에 맞닥트렸을 때 뜨거운 감자에 비유한다. 삼킬 수도 뱉을 수도 없는 정치적 · 사회적으로 미묘한 문제, 국회에서 마구 양산하고 있다. 국민은 아랑곳하지 않고 저들 이익에만 게거품을 물며 싸워대고 있다. 판사까지 탄핵하자는 말도 안 되는 뜨거운 감자를 만들어내고 있다. 국회의원 얼굴이 모두 뜨거운 감자 형상이다.
뉴스에 뜨거운 감자 이야기가 나온다. 얼른 스위치를 끈다. 집 안 가득 감자 냄새가 흘러넘친다. 자주감자 선생님의 이야기가 몽실몽실 또 떠오른다. 자주감자 선생님이 보고 싶은 계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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