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섭섭해.”
“뭐가?”
“손주 좀 안아 보고 싶은데 며느리눈치가 이상해서.”
“아 그러니까 목욕을 자주 해.”

그래도 더럽다고 하는 게 요즘 애들이라고 은퇴한 노인들이 산행을 하며 나눈 얘기란다.
과연 늙음은 그 자체 비호감인 것일까.

사람이 늙으면 집을 지키는 자들(다리, 팔)이 떨 것이며, 힘 있는 자(허리)가 구부러질 것이며 맷돌질 하는 자들(치아들)이 적으므로 그칠 것이며, 창들로 내어다 보는 자(시야)가 어두워질 것이며, 길거리 문들(입술)이 닫혀질 것이며, 맷돌 소리가 적어질 것이며, 새의 소리를 인하여 일어날 것이며(불면), 음악 하는 여자들(귀)은 다 쇠하여질 것이며, 높은 곳을 두려워할 것이며, 길에서는 놀랄 것이며, 살구나무(머리)가 꽃이 필 것이며, 메뚜기(가장 가벼운 곤충)도 짐이 될 것이며, 원욕(식욕)이 그칠 것이라고 지혜자는 말했다.

남은커녕 자신도 호감을 갖고 싶지 않은 것들로 가득해지는 것이 늙는다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이민 고려장이라는 얘기까지 듣고 있다.

“과연 노인은 이래야 하는 것인가?”

노송(老松)이 그렇고, 고석(古石)이 그렇고, 늙을수록 아름다운 것이 세상에는 얼마든지 많은데 왜 사람만은 이렇게 늙는 다는 것이 비참해야하는 것일까. 나중 모습이 더 아름다울 수는 없는 것일까. 그러다 바라보게 된 가을 억새꽃. 이야말로 노령화시대의 거울 같은 것이 아니던가.

억새는 늙어도 추하지 않고 초라하지 않다.

늙을수록 그 줄기는 더욱 고결하고 그 꽃은 더욱 화려하다.
초록의 세월이 빠져 나가고 백발이 성성하여도 서슬은 여전히 퍼렇고 지조는 여전히 꼿꼿하다. 그러면서 한없이 부드러운 꽃으로 쓸쓸해지는 가을을 어루만지는 것이 억새다.
사람도 이렇게 늙으면 되는 것 아닐까.

그러고 보니 억새는 우리민족을 닮은 풀리다. 산이나 비탈, 척박한 땅에 뿌리를 내리고 자생하는 것이 우리 민족 같고, 모진 바람에도 꺾이지 않고 꼿꼿한 풀잎 세우고 자라는 것이 우리 민족 같다. 얼핏 보면 별것 아닌 듯 하여 멋모르고 손을 댔다가 손을 베어 피를 흘려 본 일이 있는 나는 그때의 아픔을 기억하며 억새보다 무서운 풀은 없다고 생각한다. 우리 민족에게는 그런 무서움이 있다.

억새에게는 또 무서운 힘의 뿌리가 있다. 언젠가 농촌 운동을 할 때 산지를 개간하다 억새를 제거할 일이 있었는데 그때 나는 억새가 얼마나 억센 뿌리를 가지고 있는지를 알았다. 억새는 뿌리가 굵은데다 땅속으로 넓고 깊게 퍼져 연장 없이는 뽑히질 않는다.

그러한 억새들은 더 많은 다른 억새들과 무리를 지어 사는 것이 특징이다. 그래서 서로의 뿌리와 잎사귀를 의지하고 자라서 범접하기 어려운 자기들만의 나라를 이루고 이목을 모은다. 창녕 화왕산에서는 5만6,000평에서, 밀양의 사자산과 재약산의 사자평에서는 125만평에서 억새가 밭을 이루고 있다 한다. 초개에 불과한 억새가 인정받으며 사는 비결을 알만하다.

이 억새들은 그것이 무엇이든 주변에 잇는 것들과 조화를 이룬다. 소나무, 동백나무, 상수리나무, 때죽나무, 노각나무 가리지 않는다. 검은 바위 흰 바위도 가리지 않는다. 그 곁에서 조화를 이루며 자라서 꽃을 피운다.

억새의 여름이 푸른 강인함이라면 가을은 흰 아름다움이다. 그 아름다움은 겨울을 거쳐 이듬해 봄까지 이어진다. 아침 이슬이 맺히든 낙조의 노을이 물들든 각각 다르게 나타나는 것은 모두 아름다움이다.

이 아름다움을 보려고 제주도「억새오름길」을 오르는 사람들은 억새도 아름다울 수 있다는 증거를 가지고 돌아 올 것이다. 그래서 억새풀처럼 살아가는 우리 민초들에게 위로와 격려가 되는 억새는 겨울이 지나도록 허리를 굽히지도 않고 고개를 떨어뜨리지도 않는다.

그리고 세상을 떠나면서 자신의 뿌리를 약재로 줄기를 땔감으로 세상에 바친다. 그 억새가 탈 때의 화력의 가히 세상의 불의를 소멸할 만하다. 그래서 억울한 일, 괴로운 일로 탄식하는 인생들의 온갖 문제들까지 태워 버리고 흔적 없는 연기로 사라져 간다.

억새꽃 많이 핀 곳이 어디냐고 사람들이 가을 여행을 떠난다. 억새를 주제로 하여 며칠씩 축제를 여는 지방도 많다. 억새의 꽃뿐만 아니라 그 삶까지 인정하는 여행과 축제가 되었으면 한다.

특히 손주를 품에 안아보고 싶은 노인들의 황혼이 억새의 삶처럼 떳떳하고 깨끗하고 꼿꼿하고 아름다웠으면 한다. 겨울이 와도 억새들은 그 품으로 바람을 안고 은 빛 물결을 일으키며 자신들만의 춤사위를 펼칠 것이다.

/그사랑 교회 목사

최세균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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