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지난 오랜 경찰관 생활에서 내게 크게 보람을 안겼던 일화의 하나다. 당시 나는 동대문경찰서 보안과장.
‘여기는 면목2동, 비 내리는 둑입니다.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 17척 담장 안에서 4년 여의 생활을 마치고 지난 4월 16일에 출감하여, 다시는 후회없는 삶을 살고자 악의 시험 물리쳐 가며 고된 나날을 오직 신앙의 힘으로 지탱하고 있습니다. 차갑고 날카로운 세정 속, 시민의 안녕을 위해 애쓰시는 과장님께 도움 드리지 못하면서 가르침을 받으려고 백지에 잉크를 찍는 이 죄인에게 현실이 그대로 고스란히 가슴 저리게 합니다.
저는 29세 된 전과자, ‘남의 눈에 눈물 흘리게 한 자는 자기도 피눈물을 흘리게[ 된다’는 경찰서 유치장 반성문이 새삼 눈앞에 떠오릅니다.
69년 4월 10일 교도소 안에서 세례를 받고 하나님의 자녀된 영광을 얻었습니다. 손이 갈라지도록 함마를 휘두를 수 있는 육신을 가지고 있으면서 먼 친척 형님의 여섯 식구와 함께 살다가 그마저 철거 명령으로 지금은 빵 마져 막연한 촛점 잃은 나날, 그러던 중 비에 젖은 기독교 신문에서 과장님의 인생을 사는 신조를 읽게 되었습니다.
과장님, 라디오의 법률상담에 나온 어느 변호사는 소매치기에겐 손목을 자르는 엄벌을 내려야 한다고 주장하던데, 과연 그것이 인간애며 자비의 소리일까요?
과장님, 이 죄인은 물질적 도움을 청하려는 것이 아니옵니다. 다만 죄인에게 힘을 주시는 뜻에서 과장님의 저서를 저에게 내려 주십시요. 일자리가 마련되어 첫 보수를 타면 책값을 꼭 먼저 우송하겠습니다’
나는 지체없이 그가 산다는 중량천 둑을 찾아 갔다. 아무래도 사무적으로 처리할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되었던 것이다. P군은 생각보다 체격이 좋았고, 그의 형수와 조카들은 가느다란 다리가 소아마비처럼 꼬인듯 했는데 아무래도 영양실조 같았다.
‘P군, 고생하네, 어디 막일이라도 하려나?’ ‘어디 일자리가 있어야죠?’ 전라도 사투리가 물씬 풍기는 대답.
나는 그를 위해 지하철 공사장에 일자리를 언약해 두었었다. 하루 12시간 근무의 막일. 7백원 베이스에 야근 4시간에 50% 수당을 가산한다고도 일러 주었다. 그는 내 손을 뜨겁게 꼭 잡는 것이었다.
나는 어두운 판자집에 밀가루 두 포대를 내려 놓고 P군을 차에 태웠다. 현장을 일으켜야 했고, 또 나로선 몇가지 물어봐야 할 일도 있었다.
‘P군, 나는 자네에게 사과할 일이 한 있네만’ ‘무슨 말씀 그렇게 하십니까? 사과라니요?’ ‘실은 자네가 내게 보내온 편지를 현장소장에게 그대로 보여 드렸거든’ ‘잘 하셨습니다. 이제부터의 새 사람이 제가 아니겠습니까?
그의 진지함에 나의 얼굴엔 절로 미소가 번졌다.‘한가지만 더 물어보세 자넨 무슨 일로 그렇게 오래 고생했었나?’
그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침을 꿀꺽 삼킨 다음에 답을 하였다. “살인죄목이었습니다. 친구가 친구를 죽였어요. 그로 인해 친구는 처형되고 함께 다른 연루자들도 무거운 벌을 받았어요. 그 통에 저만 발을 뺄 수도 없었고, 또 젊은 것이 비겁하게 생각되어 복역을 했습니다.” “고생했네. 그래 장차의 포부를 세워 봤는가?”
“네. 얼마간의 돈이 모아지면 저의 고향 전라도의 어느 외딴 섬에 가서 기독교를 전도할 생각으로 있습니다. 어느덧 차가 현장 가까이에 이르렀다.
“P군, 이제부터 자네에게 필요한 건 굳센 의지일세. 지하철 공사는 74년까지 계속될 텐데, 그동안에 혹시 자네의 포부가 바뀌더라도 상관 없으니 기틀이 잡힐 때까지 날 찾지 않아도 되네. 이 돈은 첫 보수를 탈 때까지의 입석버스 차삯이네. 받아두게”
그는 사양했으나 나는 기어코 받게 했다. 나는 그가 지하에서 일하고 있을 도로위를 지날때면 내 운전 기사에게 속력을 줄이라고 손짓한다. 기사도 뒤늦게 까닭을 알고 내가 말하지 않아도 알아서 속력을 줄인다. 그 화음의 메아리에 내가 흠뻑 젖곤 했다.
사람이 사람을 사랑한다는 것. 이보다 더 뜨겁고 소중한 즐거움이 또 있을까?
따지고 보면 아무도 버릴 사람은 없는 것이다. 미워하는 감정 속엔 사랑하고 싶었던 전제(前提)가 있었지 않았을까.
끝내 미워하는 마음은 가시가 되어 나를 찌르더라. 먹으로 쓴 거짓이 피로 쓴 진실을 가리지 못하더라. 마음의 평화!! 삶의 종착역이 가까워지면서 큼직하게 다가오는 메시지. 무릎 끊고 두손을 모은다.
「전능하신 천주여, 오늘도 우리의 생각과 말고 행위를 평화로이 이끌어 주소서 아멘.」
P군, 지금 전라도 어느 외딴 섬에 머물고 있는가? 보고파요
/시인
이기진 논설주간
<저작권자 © 안산신문,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