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일요일 저녁이었다. 마침 어느 여자 고등학교 학생들을 대상으로 이 프로가 진행 중이었는데, “다음 사자성어(四字成語) 중에서 여성을 비하하는 내용이 아닌 것은 무엇인지 골라주세요” 라고 아나운서가 문제를 출제했다.
문제 중에는 “부창부수(夫唱婦隨 :남편의 주장에 아내가 따르는 것이 부부화합의 도리라는 뜻)”와 “삼종지의(三從之義 : 예전에 여자가 지켜야 했던 도리로써 어려서는 아버지를, 시집가서는 남편을, 남편 죽은 후에는 아들을 따라 살아야 한다는 뜻)”가 예문(例文)으로 들어있었다.
프로를 진행하던 아나운서가 어느 여학생에게로 다가가서 마이크를 내밀며 물었다. “학생! 「부창부수」가 무슨 뜻이지요?” 그러자 그 학생은 “그거요? 아버지가 창문(父窓)을 부순다는 뜻 아닌가요?” 하고 망설임도 없이 대답했다. 의외의 대답에 놀란 아나운서는 “하. 하.... 그거 말 되네요. 그럼 「삼종지의」는 무슨 뜻인가요?” 학생은 이번에도 주저 없이 대답했다. “오늘이 골든벨 울리는 날 아녜요? 그러니까 종(鐘)을 세 번 치라는 거죠.”
기상천외한 대답에 아나운서는 배를 잡고 웃었다. 나도 덩달아 따라 웃다가 제 정신으로 돌아와 생각하니 이것은 그냥 웃어 버릴 일이 아니라 참으로 심각한 문제였다.
주자학(朱子學)을 근간으로 하는 유교 사상이야 말로 이조 오백년 동안 우리 사회를 지탱해온 「리더십」이었다. 그러나 「농경사회」에서 「산업사회」로, 「남존여비사회」에서 「남녀평등」사회로, 사회 현상이 변화함에 따라 유교사상은 더 이상 사회의 「리더십」역할을 감당하지 못하고 붕괴되어 가고 있는 것이다.
오늘 저 학생의 답변이 그 단면을 생생하게 보여주고 있는 것은 아닐까? “오늘 「삼강오륜」에 대해 물어보면 답변 할 수 있는 사람들이 과연 몇 명이나 있을까?” 하고 생각해 보았다.
선진국 여행을 해본 분들은 공통적으로 느꼈으리라고 생각한다. 특히 날씨의 변화가 심한 곳에서는 그 곳 사람들의 복장이 참으로 다양하다. 모피 외투나 점퍼를 입은 사람이 있는가 하면 반바지에 티셔츠 차림도 있고, 심지어는 핫팬츠에 런닝 바람으로 다니는 사람도 있어, 얼핏 보기에 모두가 제멋대로인 것 같지만 그들이 교통질서를 지키는 모습을 보고는 감탄 하지 않을 수 없다.
교통질서만이 아니라 그들 사회에는 엄격한 규범과 질서가 있고, 강요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들 스스로가 그것을 지켜 나가는 데에는 그 사회를 지탱하고 있는 「리더십」을 사회가 변화할 때 마다 끊임없이 새로 창출해 내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는 어떠한가? 외견상으로는 예의를 지키고 질서가 있는 것 같이 보이지만 실은 그렇지가 못하다. 모두가 자기중심적이고 이기주의에 젖어 있는 것이다.
지도자들은 거짓말을 식은 죽 먹듯 쉽게 하는가 하면, 학원에서는 왕따가 판을 치고, 휴대전화로 선생님을 112에 고발한다. 교통 단속원이 보이지 않으면 도로의 갓길은 주차장으로 변하고 만다. 이것이 우리의 현실이고 이런 현상이 생기는 것은 우리 사회를 지탱해줄 「리더십」의 공백상태 때문이라고 사료된다.
이런 이유로 우리 사회의 새로운 시대를 열어갈 「리더십」을 창조하는 일이 시급한 과제로 다가왔다. 서방 선진국들은 “르네상스를 통해 신을 부정했을 때, 인간자신(人間自身)을 도로 찾을 수 있는” 「휴머니즘」을 창출 해 냈으나, “산업혁명을 통해 인간이 만들어낸 기계 때문에 수많은 사람들이 직장에서 쫓겨났을 때”, “인간이 만들어 낸 돈 앞에서 한 없이 비굴해지는 인간들, 그리고 인간이 만들어 낸 폭탄 앞에서 인간들이 떨고 있을 때” 앞으로 인류가 가야 할 길을 찾기 위해 「자연으로 돌아가라」는 자연주의를 비롯해 「실존주의 철학」등 수많은 리더십이 등장했다. 오늘도 수많은 학자들이 변화하는 시대를 뒷받침하고, 지탱할 수 있는 「철학적 리더십」을 창출해 내기 위해 고심하고 있는 것이다.
이제 우리도 우리 몸에 맞는 「철학적 리더십」을 만들어 내야 한다. 그리고 그 「리더십」은 정직, 신의, 효친사상, 나라사랑, 경로사상 같이 예로부터 전해져 오는 철학을 근간으로 해서 새로운 시대의 남녀평등, 상호 존중과 배려, 원칙중심, 사랑의 나눔 과 “자기 일에 최선을 다해 공동체의 일원으로 더불어 살아가면서 행복한 사회를 구현” 하는 것을 그 내용으로 해야 할 것이다. “이제, 한 여학생의 엉뚱한 답변에 웃고 있을 수만은 없지 않은가?「철학적 리더십」이 받쳐주지 않는 사회는 표류하는 한 척의 배와 같다는 것을 심각하게 생각하자.”
이재중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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