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은 살면서 한번쯤 여기와 다른 곳을 꿈꾼다. 그 때 어떤 이들은 여행을 떠난다. 다른 장소, 다른 사람들 속에서 일상의 공격을 이겨낼 돌파구를 찾아보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여행과 연애는 서로 닮았다. 가보지 못한 곳, 새로운 사람은 늘 사람을 설레게 만든다. 피로한 현실의 벽을 뚫고 섬광처럼 빛을 안겨준다.

<비키 크리스티나 바르셀로나>라는 원제를 가진 우디 앨런의 영화 <내 남자의 아내도 좋아>는 여행과 연애, 그 둘 모두를 다룬다. 비키와 크리스티나, 두 미국인 아가씨가 바르셀로나로 여행가서 전혀 예상하지 못한 연애사건에 휘말리게 된다는 이야기를 뼈대로 갖고 있다. 여기서 ‘바르셀로나’ 라는 장소는 단순히 여행지로 한정되지 않고 여러 가지 의미를 담고 있다. 그것은 삶에서 끝없이 우리가 욕망하는 것들의 집합체다. 연애가 될 수도 있고, 예술이 될 수도 있고, 삶에서 마주치는 신선한 자극이 될 수도 있다. 어찌되었건 그건 관성적으로 유지하던 삶이 잠시 멈추는 사건이고, 어떤 낯설고 설레는 것과의 만남이다.

모든 일을 계획대로 하기를 원하고 사랑에 있어서 진지하고 안정적인 관계를 원하는 비키(레베카 홀)와 달리, 크리스티나(스칼렛 요한슨)는 고통까지도 감수하는 열정적인 사랑에 자신을 온전히 내맡길 준비가 되어있다. 영화는 이렇게 다른 스타일의 두 여인이 여행지에서 우연히 만난 스페인 화가, 후안(하비에르 바르템)과 사랑에 빠지게 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처음에 바람기 다분한 후안을 탐탁지 않게 여기던 비키는 이국적인 풍광의 로맨틱한 분위기에 취해 후안에게 열정적인 감정을 가지게 되지만, 이미 버스는 지나가고 없다. 처음부터 후안에게 끌려하던 크리스티나가 이미 후안과 잘 돼가고 있는 것이다.

항상 자신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알고 있다고 생각하던 비키는 후안과의 만남이후로 혼란에 빠지게 된다. 곧 안정적이고 성실한 남자와의 결혼을 앞두고 있는데, 가보지 않은 길에 대한 미련을 계속 버리지 못하고 불안해하는 것이다. 반면 크리스티나는 자신이 동경하던 예술적 비전을 가진 사람을 만나 망설임 없이 열정적인 사랑을 나누게 되지만, 그것 또한 평탄하게 지속되지는 않는다.

치명적인 매력을 가진 후안의 전처 마리아(페넬로페 크루즈)가 갑자기 나타나 둘의 관계가 깨질 것이라는 쉬운 예상과 달리 셋은 균형적이고 충만한 관계를 유지하게 되는데, 크리스티나는 오히려 그 완벽한 상태에 싫증이 나기 시작한다. 크리스티나가 빠진 후안과 마리아의 관계 또한 다시 격정적인 자기 파괴의 상태로 돌아가게 되고, 결국 영화 속에 나오는 어느 누구도 관계 속에서 만족감을 누리지 못하고 영화는 끝난다.

올해 한국나이로 75살이 되는 우디 앨런 감독은 기본적으로 인생이 비관적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여행과 연애처럼 아주 잠시 삶의 희열을 느끼는 순간이 올지 모르지만, 근본적으로 사는 건 끝없이 이어지는 결핍의 연속이다.

간절히 갖고 싶던 것을 손에 넣는 순간 물거품처럼 허무감이 쏟아지고, 갖지 못하면 평생 그것 때문에 만족 없이 살아가게 되는 것. 이건 앨런의 인물들이 늘 우스꽝스럽게 직면하는 인간의 모순이다. ‘내가 뭘 원하는지는 모르지만, 내가 원치 않는 것이라면 잘 알고 있다’는 크리스티나의 대사처럼 결국 인간이 처한 딜레마는 자신이 정말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모른 채 끝도 없는 결핍을 채우기 위한 여정을 멈추지 못하는데 있다.    

그는 한 인터뷰에서는 "겉보기에는 안 그렇게 보이지만, 난 이 영화가 꽤 비관적이고 슬프다고 생각한다"라는 말을 했다. 안정된 삶을 원하던 비키는 갖지 못한 욕망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한 채로 허울뿐인 결혼생활을 시작하고, 열정을 쫓아 모든 것을 내 던지던 크리스티나 역시 어떤 것에도 만족하지 못하고 계속 새로운 것을 찾아다닌다.

그 어느 쪽으로 가던지 삶의 출구는 보이지 않는다. 비키와 크리스티나가 공항에서 카메라를 지나치는 이 영화 마지막 장면에서 결국 우리가 마주치는 건 어디로 가야할 지 몰라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사람의 당혹감이다. 우디 앨런 특유의 유머와 계속 흘러나오는 영화음악, 근사한 바르셀로나의 풍광을 보고도 어쩔 수 없이 남게 되는 헛헛한 심정은 여기에 기인할 것이다.

그러나 우디 앨런의 인물들은 그렇게 속에 쌓아둔 심정들에 대해 누군가와 끝임 없이 이야기 한다. 그들은 우스울지언정 정떨어지지는 않는다. 비관적인 주제를 말하면서도 그의 영화가 냉소적이지 않은 이유는 그 때문이다.

고민이 속에 쌓여있지 않고 수다거리가 되고나면 심각한 상황에서도 피식 웃음 터뜨릴 수 있는 여유가 생기는 것이다. <내 남자의 아내도 좋아>에는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문제를 간직한 채로 극장 문을 나서지만, 유머 있고 속 깊은 친구에게 비밀 얘기를 털어놓고 나서 느낄 수 있는 가벼움의 정서가 있다. 도저히 어디로 가야할지 몰라 막막하지만, 그게 나만 그렇지 않다는 위로. 그 길 위에 내가 서 있듯 누군가도 똑같이 방황하고 있다는 작은 위로를 주는 것이다.

영화 속에는 "충족되지 않는 사랑이야말로 가장 로맨틱하다"라는 대사가 나온다.

충족되지 않는 사랑을 채우는 것은 또 다른 환상이다. 대부분의 삶은 어쩌면 그 환상에 의지해서 기우뚱하게 유지해 나가는 것인지도 모른다. 후안과 마리아와처럼 균형을 유지시켜 주는 성분 1%를 찾아 끝없이 애증의 관계를 반복하는 사랑에서 일상은 무너져 버리기 쉽다. 현실적 관계에서 인간이 발견할 수 있는 완벽함은 빠진 1%를 채우는 노력이 아니라, 그 빈자리를 담담히 인정하는 거리에서 나오지 않을까. 

송보림 영화평론가  freehelper@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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