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려야 할 것이 / 무엇인지를 아는 순간부터 / 나무는 가장 아름답게 불탄다 // 제 삶의 이유였던 것 / 제 몸의 전부였던 것 / 아낌없이 버리기로 결심하면서 / 나무는 생의 절정에 선다(후략)
바스락 바스락 낙엽의 마른 기침에 속절없이 가을이 지고 있다. 바람의 서슬에 쫓겨 마구 뒹구는 낙엽이 그걸 말해주고 있다. 가라앉는 석양에 비치는 조락의 그 정경에서 우리는 새삼 인생과 견주어 보곤 한다. 더욱 서글퍼진다. 무엇인가가 사라지는 기분이다.
우리가 무심히 더러는 낭만이라면서 스스럼없이 밟고 가는 낙엽 - 그러나 다시 생각해 보면 소임을 다하고 진 낙엽은 그래도 뿌리로 돌아가고 있건만 우리는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가 한번쯤 쉼표 찍고 물음표를 던져 볼 일인가 한다. 닻을 내릴 자릴 제대로 찾자구나.
「떠날 때를 알고 떠나가는 이의 뒷모습은 아름답다」고 찬양한 시인도 있었고 거취의 소중함을 깨우친 시인도 있었고 때가 되어도 떠날 줄 모르고 가냘프게 가지에 매달려 있는 이파리의 추하고 미련스러움을 개탄한 스님도 있었다. 거기다 문득 故 金玉吉 선생이 남긴 교훈이 생각나서 금시 숙연해진다.
그가 이화여대 총장과 문교부 장관을 다 내놓고 저 문경새재 산장에 머무르던 때의 일이다. 늦가을 어느날 아침 일찍 산책길에 나서니 도랑물이 산책길에 넘쳐나고 있었다. 간밤 쌓인 낙엽이 도랑을 막았던 것이다. 그는 손수 낙엽의 떼죽음을 치우고 나서 혼자 중얼중얼 다짐했다는 것이다. (이 늙은 것이 결코 물길 막는 낙엽이 되지 말아야지!) 불현듯이 내 인생에서 부질없이 낭비한 세월을 점검해 볼 필요를 느낀다. 내 인생의 전성기 - 나름대로 기염을 토했던 그 숱한 삶의 현장들 그러나 하늘에 대고 힘껏 쏘아올린 화살들은 맞힌 느낌 별로이니 아마도 거의가 빗나가 어느 골짜기에 거꾸로 박혀 녹슬었나 보다.
매순간 『그때 그러지 말았을 것을…』하는 뉘우침과 『그때 그렇게 하였을 것을…』하는 아쉬움이 줄기차게 나의 황혼을 매질한다. 차라리 처음부터 물처럼 낮은데로 흘렀더라면 지금쯤 大海에 이르렀을지도 모를 일을…
잠시 알맹이가 시답잖은 보따리를 안고 종착역을 향하는 길목에서 아직도 서성거리고 있는 나의 자화상을 그려 본다. 흡사 앙상하게 발톱 박아 간신히 풀잎을 붙들고 있는 매미 껍질 같은… 그 껍질의 등을 째고 날아간 매미는 가까운 나무 그늘에서 한창 신나게 노래 부르고 있어 위안은 되지만 갑자기 비극의 주인공 같은 기분에 젖기는 매한가지다. 낙엽의 順命을 보면서도 깨달음을 얻지 못하고 있음이다. 나에겐 좀처럼 차창밖으로 스쳐가는 경치에 지나지 않는 그런 삶이란 없었고 늘 아픔이 수반되었던 때문일까?
꽃이 만개하면 이윽고 이울어 그 화려함을 접고 보름달은 만월의 순간부터 바로 기울기 시작하며 한낮의 태양은 중천에 이르면 서쪽으로 몸을 기울면서 이미 그 빛 속에 저녁의 어둠을 품고 있듯이 이것이 한 순간을 찬란하게 누린 꽃과 달과 태양의 겸손임을 이제야 온 몸으로 아리도록 깨닫다니 매양 똑똑하려고만 하다가 마모된 내 생의 모서리여. 이 모두가 버릴 것을 버리지 않다가 가질 것에 혼돈을 빚은 탓이리라 여겨진다. 이제 남은 시간을 잴 수 없어 답답할 뿐이다.
팽팽히 당겨진 줄에서 소리가 난다. 노상 팽팽하게 긴장된 우리 사회에서는 조금만 닿으면 큰소리가 난다. 그 큰소리를 내지 않으려니 나는 이따금 「나 아닌 내」가 된다. 그리고 「나 아닌 내」가 곧잘 무엇인가 저지른다. 그래서 마냥 후회의 연속이다.
낙엽지는 스산한 거리에 大選의 열기만이 유독 뜨겁다. 이럴 때면 어김없이 생각나는 탈무드의 교훈 하나. 「완전히 가라앉은 배는 다른 배의 항해에 방해가 되지 않는다. 그러나 반쯤 가라앉은 배는 다른 배의 항해에 방해가 된다」
大選 후보들이 대통령이 연습하는 자리가 아님을 인식한다면 이 교훈과 함께 손자의 병법 「최상의 전술은 싸우지 않고 이기는 것이다. 승산없는 싸움은 하지 않는다」는 원리쯤은 익히고 있어야 하리라! 밑져도 좋다는 싸움은 실은 배짱도 아닌 그저 무모한 짓이요 회생일 뿐이다. 그것이야말로 진짜 바보가 하는 짓인 것이다. 꾀 많기로 유명했던 曺操도 「辛勝」은 없다고 하였으니 차라리 「남을 행복하게 하는 것은 향수를 뿌리는 것과 같아서 뿌릴 때에 자기에게도 몇 방울 정도는 묻는다」는 격언에 솔깃함이 어떨까 싶다. 여기서의 남이란 우리 국민 모두를 지칭함이니 진정 국민을 생각한다면 후보들은 이를 명심 또 명심할지어다.
-이기진 안산신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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