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 마중 아닌 꽃 도둑

수필가(안산신문 아카데미7기) 이 인 옥

두툼한 옷을 벗어던지기에는 아직 빠른 3월의 첫 주말이다. 제주도는 물론 남쪽지방 곳곳의 들과 산에 꽃들이 피었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가까운 곳 수리산으로 꽃 마중을 갔다. 수리산 정상을 뒤로 남동방향으로 수리사가 있다.

남편과 함께 모처럼 야생화를 찾아 산과 들로 나서기는 했어도 지난겨울 내린 눈으로 하얗게 덮여있었던 탓인지 아직은 나무 가지며 대지가 잿빛 그대로 남아있었다. 

나는 남편과 둘이서 그곳에서 만난 또 다른 부부와 함께 이름 모르는 야생화를 사진기에 쓰러 담기 위해 수리사 근처 산언덕을 더듬어 샅샅이 뒤졌다. 누렇게 시들어 있는 낙엽 사이를 헤집고 연초록 잎 사이로 노랑꽃잎을 달고 인사를 넙죽하는 놈을 보았다.

봄에 핀 야생화는 여름이나 가을에 핀 꽃 보다 꽃줄기도 꽃잎도 대부분 작아 눈에 쉽게 띄지 않았다. 산등, 산골 할 것 없이 앙상한 나무가 서 있는 곳이면 지난 가을 벗어 던진 잎들이 아직은 썩지 않고 그대로 싸여있다. 그 나뭇잎과 누렇게 시들어 말라비틀어진 풀 사이를 비집고 삐죽 내민 파란새싹들이 보였다. 그 새싹 중심에 보라색꽃송이를 올망졸망 달고 하늘을 보고 따스한 햇볕을 기다리는 한 여석이 스쳐 지나가는 봄바람에 고개를 끄덕이고 있다.

아직은 찬 기운을 잔득 머금은 날씨 탓인지 나비도 벌도 기척이 없다. 찾아주고 반겨주는 것 하나 없이 쓸쓸함이 가득해 보였다. 그런데도 꽃들은 방긋 웃으며 마냥 즐거워했다.

그 모습이 너무 아름다워 준비한 사진기에 담아 보려고 하는데 그것도 모르고 연신 인사를 하느라 끄덕였다. 사진 한 장 찍을 수 있도록 그만 멈추고 포즈를 취해 달라 부탁을 했다. 꽃들은 자기사진이 필요 없기도 하지만 그걸 떠나 사진 값 치룰 돈이 없으니 어떻게 하느냐? 며 멈추지 않고 끄덕였다.

사진 값 받지 않겠다고 했더니 그럼 모델로 부탁하느냐? 그렇다면 모델료를 먼저 지불해 달라고 했다. 사람 사는 세상 못지않게 식물들 세계도 인심이 각박했다.

마지못해 남편이 그의 몸을 붙잡았다. 그러자 뿌리쳤다. 어쩔 수 없이 좌우 앞뒤로 흔들어 되는 모습을 사진으로 담았다.  그리고 고맙다고 인사를 했다. 꽃들은 짜증스러운 표정을 짓더니 체념이라도 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잘 가라고 두 손을 흔들었다.

나는 이름도 모르고 눈에 띄는 놈이면 붙잡고 한 장 찍자고 하며 사진기를 갔다 됐다. 그러면 다소 곧이 포즈를 취해주는 놈이 있는가하며, 안된다고 손사래를 치는 놈, 고개를 숙여버린 놈, 코를 찌르는 냄새를 풍기는 놈, 잎으로 꽃잎을 감싸는 놈, 다양한 모습으로 자신을 숨겼다.

그것도 불구하고 연신 사진기 셔터를 눌러 됐다. 땅에 철썩 달라붙어 수줍은 듯 얼굴만 삐죽 내미는 야생화들, 사람들이 그들을 보며 즐거워하는 것을, 아름답다고 흐드러지게 칭찬하는 것을, 그 칭찬을 듣기위해서 그리도 앞 다퉈 꽃망울을 터트렸는지? 이른 봄날 날씨도 쌀쌀한데 기특하기도 했다.

나는 남편과 함께 봄날 하루 양지바른 언덕에 피어있는 야생화 마중에 지난겨울 추위에 떨며 잔득 웅크린 허리를 펴고 가슴을 활짝 폈다. 그리고 새로운 기를 얻어 상쾌해진 기분을 앞세워 집으로 돌아왔다.

돌아오는 길에 아름다운 향기를 풍기는 야생화 한포기를 슬쩍 했다. 뿌리 체 뽑아 비닐봉지에 조심스럽게 싸 가방에 넣었다.  인간의 속성! 견물생심! 그것을 확인하는 하루가 되기도 했다. 그래! 그래 나도 별 수 없는 인간이구나 하는 생각을 하면서 산에서 야생화 한 포기를 훔쳤다.

오늘 우리부부는 결국 꽃 마중을 갔다 꽃 도둑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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