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신석정은 「가을에는 기도하게 하소서」 시인 릴케는 「가을은 위대하였습니다」라고 읊으면서 가을을 찬양했건만 지금 우린 전혀 그런 기분이 못된다. 차라리 크게 원망스럽고 저주스런 악상황 속에서 허우적대고 있다. 삼가 희생자들의 명복을 빌며 그 유가족들의 슬픔을 위로합니다.
이럴 때면 문득 생각나는 그 위대한 설법- 한 高?는 천국과 지옥을 가르켜 그 차이점을 이렇게 말했다. 식사시간에 지옥에 가 보니 음식이 산해진미로 가득히 차려져 있었다. 그런데 사람들은 영양실조에 걸려 비실비실 쓰러지려 하고 있었다. 알고 보니 주어진 젓가락의 길이가 저마다의 팔 길이와 같아서 도저히 음식을 집어 자기 입에 넣을 수가 없었던 것이었다. 그런데 똑같은 조건인데 천국에서는 피둥피둥 살이 쪄서 화기애애하게 식사를 즐기고 있었다. 알고 보니 그 긴 젓가락으로 음식을 집어선 서로 상대방의 입에 넣어 주며 즐거워하고 있었던 것이다. 같은 조건인데 말이다.
이번 참회가 아무리 절망이요 비극적이라 해도 ‘희망’과 ‘좌절’은 어차피 ‘인생의 공약수’가 아니던가.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천국의 식탁에서처럼 하며는 어찌 막힐 일이 있으리오. 우리는 지금 천국의 식탁풍경을 눈여겨 보고 있는 것이다.
그래도 계절은 어김이 없다. 솔솔 가을바람이 콧잔등을 간지럽힌다. 드높고 짙푸른 하늘은 금방이라도 ‘툭’하고 쪽빛 잉크를 흘릴것만 같다. 지천에 떼지어 피어있는 코스모스는 그 청초하고도 가냘픈 몸짓으로 바람엔 도리질하면서 우리를 부르며 재기하라 위로의 메시지를 보내오고 있다. 그지없이 고맙고 반갑다.
가을은 이래저래 우리를 생각하게 한다. 불현듯 김용호의 시 <주막에서>가 떠올라 입맛 다시며 미소짓는다. 좀 느긋하고 싶어서다.
어디든 멀지감치 통한다는 / 길 옆 / 주막
그 / 수없이 입술이 닿은 / 이 빠진 낡은 사발에 / 나도 입술을 댄다
흡사 / 情처럼 옮아 오는 / 막걸리 맛
여기 / 대대로 슬픈 路程이 집산하고 / 알맞은 자리 저만치 / 威儀 있는 송덕비 위로 / 맵고도 쓴 시간이 흘러가고… // 세월이여! //
소금보다도 짜다는 / 인생을 안주하여 / 주막을 나서면 //
노을 비낀 길은 / 가없이 길고 가늘더라만 //
내 입술이 닿은 그런 사발에 / 누가 또한 닿으랴 / 이런 무렵에.
자주 되풀이되는 어둡고 습기찬 우리네 세월의 터널이 너무 길게 느껴지지만 기회의 막차를 놓칠 수는 없지 않는가. 고작 맥없이 흩날리는 낙엽의 유언에 솔깃할 순 없지 않는가. 어둠으로부터 빛으로 나아가려는 강인하고도 질긴 의지가 필요한 때인 것이다. 더는 허공에 침묵의 화살을 쏘아댈 일이 아니다. 그럴 한가한 시간이 없다.
한 번도 만나보지 못한 내일-그 내일을 찾아 나서면 의례 거기 피곤한 오늘이 누워 있겠지요. 그 모양을 보면서 어찌 뻔뻔스런 방관자일 수 있으리오. 아무리 아리고 저리더라도 가슴 속에 곰팡이 피게 둘 수는 없지요. 마냥 두리번거리다가는 기어이 가라앉고 만다. 거리가 바로 나락이다.
그런데 자기만 가라앉으면 대순가? 「완전히 가라앉은 배는 다른 배의 항해에 방해가 되지 않는다. 그러나 반쯤 가라앉은 배는 다른 배의 항해에 방해가 된다」했으니 반쯤 가라앉을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공동체는 그래서 책임이 主成分이다.
이럴 때 꼭 발휘돼야 할 것이 호연지기가 아닐까. 굳센 부활의 의지를 다진 호연지기 말이다. 그러면 반드시 하늘은 메아리로 화답할 것이다.
분명한 것은 지구는 24시간 쉬지 않고 돌아간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인생은 자전거 타기와 같아서 페달을 밟지 않으면 넘어진다. 그러니 쉬는 것이 먼저인 사람은 노상 처지게 돼있다.
그렇더라도 삶이 정 힘겨우면 도중 주막에라도 들려 남의 입술이 닿았던 이 빠진 낡은 사발에 막걸리를 가득 채워 마시는 멋스러움이 있어야지. 그것이 또한 바로 삶의 새 충전인 것이다.
어떤 경우에도 해일로 양어장에서 유실된 물고기를 낚으려고 모여든 낚시꾼들의 모습이 우리의 모습일 수는 없다. 고통분담이 없는 사회는 대립과 저항을 부른다.
저 맑은 하늘 소슬바람 고요한 새벽에 벌거벗은 마음으로 차분히 계획을 세워서 우리 함께 몸과 맘을 살찌우자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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