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려니<부부상담사>

큰 애가 태어나기 한 달 전쯤 나는 제주 고향 집에 있었다. 봄이었다. 병원에서는 아기 머리가 크다며 수술을 해야 한다고 했다. 나는 조금 불안해졌다. 그곳의 의료 수준에 대한 막연한 불신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아이가 나오면 얼마간 친정집에 맡겨야 하는 사정이 있었다. 나는 어쩔 수 없이 그 불안을 감수할 수밖에 없었다.
출산용품을 하나씩 장만하는 틈틈이 서울에 있던 남편에게 편지를 썼다. 편지를 부치러 우체국에 다녀오는 길이면 꽃을 샀다. 후리지아였다. 형편이 넉넉지 않았기에 한 단을 살지 두 단을 살지, 안개꽃을 곁들이는 것이 사치일지 아닐지 머릿속이 분주했다.
아이 아빠는 아이가 세상에 나올 때 내 곁에 없었다. 이런 몇 가지 결핍이 나를 슬프게 했다. 그런 가운데서도 아이는 무사히 태어나 쑥쑥 자랐다. 간난 속에서 끝내 이룩한 성취였다. 지금도 후리지아를 보면 그때의 성취, 아이가 반사적으로 떠오른다. 봄의 꽃 후리지아는 그렇게 아들의 꽃이 되었다.
보름 전 생신상을 차려 드리고 떠나올 때 아버지는 작은 석류 두 그루를 주셨다. 길게 자란 가지를 가위로 뚝뚝 잘라 뿌리에 묻은 흙까지 고이 담아 주셨다. 두 그루를 주신 까닭은 지난여름에 가져온 석류를 내가 잃었기 때문이었다. 그때 가져온 것은 꺾꽂이를 한 석류였다. 뿌리가 제법 튼실했었는데 그늘까지 만들어준 내 노력도 소용없이 폭염에 죽고 말았다. 두 그루 가운데 하나는 살겠지. 이번에 두 그루를 주는 까닭을 아버지가 굳이 말하지 않아도 나는 그 뜻을 충분히 읽을 수 있었다.
석류를 가져오고부터 날이 몹시 추웠다. 대추밭에 가져가 심으려 해도 땅이 얼어 팔 수도 없었다. 석류를 아버지가 주신 그대로 거실 화분 위에다 놓아 두었다. 무참히 가지가 잘린 채 비행기에 실려 기온이 급강하한 곳으로 온 탓에 석류가 죽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어떤 과학적 근거가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저 이번에는 꼭 살리고야 말겠다는 마음에 바로 눈앞에 두고 살피고 싶었다.
생신날 아침 아버지는 한껏 기분이 고조되어 있었다. 색색의 은박 커튼이 쳐지고 줄에 묶인 레터링 풍선이 거실 양쪽 벽을 다 가리고 풍선이 곳곳에 떠다녔다. 7남매 모두 앙증맞은 크리스마스 장식을 머리에 꽂고 사진 촬영을 할 때는 눈을 꼭 감고 감정이 복받친 듯 자꾸만 머리를 뒤로 젖혔다. 나는 홀로 은박 커튼 앞에 선 아버지가 눈을 감은 채 한 손을 번쩍 쳐든 모습을 사진으로 남겼다. 아버지는 바보같이 나왔다고 싫어하셨지만 나는 그 사진이 마음에 쏙 들었다. 이런 날을 몇 번이나 더 누릴 수 있을까 싶어 서글프고 그러면서도 아주 기쁜, 슬픔인 듯 기쁨인 듯한 기분을 이보다 더 잘 표현할 수는 없었다.
밭에서 화분과 원예용 상토를 가져와 석류를 심었다. 대추나무 한쪽에 석류를 옮기기 전까지 곁에서 살피기로 했다. 뿌리가 제법 커서 그것을 펴서 심으려다 보니 석류는 가운데에 자리 잡지 못하고 한쪽에 치우쳐 버렸다. 상관없었다. 중요한 것은 꺾이지 않는 삶이었다.
이제 석류를 볼 때마다 아버지가 떠오를 것이다. 울음이 터질 것 같아 눈을 꼭 감고 손을 번쩍 들었던 아버지가 반사적으로 떠오를 것이다. 후리지아를 보면 내 아들이 바로 떠오르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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