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려니<부부상담사>

 한식을 앞두고 가족과 성묘를 한 뒤 점심을 먹었다. 대화 중에 재밌는 사실을 발견했다. 남편의 형제자매 육 남매와 그 후손 가운데 물건을 잘 버리지 못하는 사람이 많았다. 육 남매 가운데 셋이나 그랬고 조카도 한 명 있었다. 그 자리에 없던 누나들의 자녀까지 알아보면 더 많은 수가 이 집합에 포함이 될지 몰랐다. 한 가족 안에 이렇게나 많은 수가 물건을 잘 버리지 못한다는 사실이 무척 놀라웠다.
 결혼 초, 옷장에 빛바랜 남편의 스웨터가 한 무더기 있었다. 나와 사귀며 그 옷을 입는 걸 본 적이 없었다. 유행에도 한참 뒤진 거라 나는 옷을 가져다 버렸다. 남편은 귀신처럼 옷이 사라진 것을 알아차렸고 무척 화를 내었다. 할 수 없이 쓰레기통에서 다시 옷을 주워 왔다. 그 후에 남편이 쓰레기통에서 건진 그 옷을 입는 걸 본 적이 없다.
 스웨터로도 교훈을 얻지 못한 난 그 후로도 그의 옷을 몰래 버렸다. 남편은 구멍이 나지 않으면 절대 옷을 못 버리는 성미였다. 나는 얼룩이 지거나 색이 바랜 옷을 시시때때로 버렸다. 그러면 남편은 꼭 그 옷을 찾았다.
 “옷이 어디로 갔지? 난 모르는데”
 난 시치미를 뚝 뗐고 이런 연기가 잘 통하는 줄 알았다. 그런데 어느 날 그가 불쑥 이렇게 말하는 것이 아닌가?
 “내가 모르는 줄 알지?”
 빛바랜 스웨터와 함께 남편이 신혼집으로 가지고 와 혼자 이십칠 년을 버틴 물건이 있었다. 무게를 조절할 수 있는 덤벨 세트와 크고 작은 아령이 한가득 있는 운동 기구 세트였다. 지금껏 그가 아령을 들었다 놓는 걸 내 눈으로 본 적이 없다. 그런데도 남편은 한사코 그것을 버리지 못하게 했다. 좁은 베란다에서 뒹구는 그것들에 치여 넘어지거나 발을 다칠 때마다 화가 치밀어 올랐다.
 석 달 전이었나, 둥그렇게 생긴 덤벨 원판 하나를 슬쩍 버려 보았다. 그는 물건이 없어지거나 위치가 바뀌면 한눈에 알아차리는 놀라운 재능이 있었다. 원판 하나가 없어졌는데 모르는 건지 모르는 척하는 건지 아무 말이 없었다. 일주일 후에 다시 하나를 버렸다. 알아차릴 법한 데 이번에도 말이 없었다. 그렇게 하나씩 버리다가 에라 모르겠다, 하고 남은 것을 몽땅 내다 버렸다. 싱겁게도 그는 아령에 대해 오늘까지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내가 모르는 줄 알지?”라는 말조차 없었다.
 말하자면 나는 물건을 버리지 못하는 그를 위한 필터였다. 나라는 필터를 통과하면 그는 물건을 버리는 데서 오는 죄책감을 느끼지 않아도 되었다. 그래서 그 어마어마한 덤벨 세트가 없어져도 아무 말이 없는 것이다.
그가 알아야 할 것이 있다. 필터 노릇하기 쉽지 않다. 여간 고단한 게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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