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려니<부부상담사>

토요일 오후, 퇴근한 남편과 둘이 밭으로 갔다. 올해도 배추는 어김없이 자랐고 나는 내키지 않는 김장을 해야 했다. 구멍이 숭숭 난 배추는 눈을 씻고 보아도 초록의 기운을 찾을 수가 없었다. 달팽이에게 시달려 누렇게 떠 있었다. 겉잎을 마구 벗겨내니 제법 튼실하게 들어찬 속이 나와 그나마 다행이었다. 대략 열 포기 정도는 담글 수 있을 거 같았다.
무를 뽑고 알타리무 한 단, 쪽파와 대파, 갓을 손질하여 돌아왔다. 원래는 자기 전에 배추를 절여놓고 일요일 아침에 김치를 담글 생각이었다. 그런데 남편의 일정 하나가 취소되는 바람에 김장이 앞당겨졌다. 난 왜 배추를 여섯 시간 절인다고 생각했을까? 터무니없게도 난 여섯 시간 정도면 배추가 다 숨죽을 것으로 믿고 있었다. 인터넷에 찾아볼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오후 세 시에 소금물에 담근 배추는 잘 시간이 되어서도 뻣뻣하게 살아 있었다. 아홉 시 무렵에 양념을 버무릴 생각으로 씻어놓은 쪽파와 갓의 물기가 마르고 있었다. 채로 썬 무가 담긴 함지박에 덮개를 씌우며 미리 마늘과 생강을 갈아놓지 않은 건 선견지명이었다고 좋아했다.
결국 김장은 포기하고 잠자리에 들었다. 새벽 시간으로 알람을 맞추고 배추가 너무 짜게 되면 어쩌나 걱정하였다. 그러나 그리 크게 걱정한 것은 아니었는지 정작 알람이 울렸을 때 난 자리에서 일어나지도 않았다. 나 대신 알람을 끈 남편도 다시 잠을 청했다. 결과적으로 우리가 더 잠을 청한 것은 백번 잘한 일이었다. 실컷 자고 일어나 살폈을 때도 여전히 배춧잎이 살아 있었기 때문이었다.
우리는 오후까지 기다릴 생각이 없었다. 배춧잎이 조금 뻣뻣하면 어떠랴 싶었다. 배추가 짜지 않게 절여지는 게 더 중요했다. 열 시가 되자 나는 배추를 씻었다. 남편은 수확 후 건조기로 말려 둔 고추를 믹서에 넣어 물과 함께 갈았다. 이것에 젓갈과 매실액과 배즙을 섞었더니 색깔이 무척 고왔다. 올해 새로 시도해 본 방법이었다. 그동안은 말린 고추를 방앗간에 가져가 가루로 빻은 다음 김장에 써왔다. 이 방법이 가루로 빻아 쓸 때보다 훨씬 양이 적게 들었다. 내년 김장을 하며 설마 이걸 잊지야 않겠지, 우리는 농담을 했다.
우리는 배추의 염도를 무척 중요하게 생각했다. 그러나 지금 문득 생각이 났다. 그렇게 걱정했으면서 단 한 번도 절인 배춧잎을 뜯어내 맛본 적 없다는 사실을. 심지어는 수육을 먹을 때조차 배춧잎에 싸 먹지 않았다. 굴을 넣어 버무린 양념 속을 곁들였을 뿐이었다. 그래서 이 글을 쓰다 말고 베란다로 달려갔다. 하루 숙성시킨다고 알타리김치와 배추김치 각각 한 통씩을 아직 김치냉장고에 넣지 않고 있었다. 배추김치 안쪽으로 손을 넣어 배춧잎 하나를 뜯었다. 맛있었다. 그것도 기가 막히게 맛있었다.
밭에서 배추를 키우기 시작한 지 어언 십 년. 생각해보면 그동안 나는 김장을 대충대충 치러낸 것 같다. 올해는 배추 절이는 시간을 착각했고 찹쌀풀 넣는 걸 빼먹었다. 작년에도 역시 무언가를 잘못했을 거고 무언가를 놓쳤을 것이다. 내년에도 역시 그럴 것이다.
이런 일을 반복하는 것은 아마도 내키지 않는 일을 억지로 하기 때문인 듯싶다. 신기한 것은 그렇게 담근 김치도 맛있다는 거다. 재료가 신선하기 때문이지만 무엇보다 뭐 하나 잘못되거나 부족해도 나머지 것들이 다 그 곤궁을 메워주는 김치의 특성 때문일 것이다. 김치를 빼면 삶에 이런 일을 만나는 행운이 내게 또 있을까?

안산신문  ansansm.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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