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려니<부부상담사>

십수 년도 전의 일이다. 친해지고 싶은 여자가 있었다. 남편의 지인 관계가 내게로 확장되는 과정에서 알게 된 여자였다. 그녀는 나는 동갑내기였고 같은 대학교를 나왔다는 공통점이 있었다. 그녀는 똑똑하고 단정했다. 어느 날 그녀와 약속을 잡았다. 귤 한 상자를 들고 그녀의 집으로 갔다. 이런 얘기 저런 얘기를 하던 도중이었다. 그녀가 불쑥 물었다. “ 오늘 왜 왔어?” 그녀가 던진 말은 미약하나마 내 가슴에 파동을 일으켰다. 이야기 도중에 뜬금없이 나온 말이었기 때문이다. 의아했지만 곧이곧대로 너랑 친하게 지내고 싶어서, 라고 말해 주었다. 그녀가 어떤 표정을 짓고 어떤 답을 했는지는 기억에 없다. 그러나 한참 뒤에 그녀가 “ 오늘 왜 왔어?” 하고 또 물었다는 건 분명히 기억한다. 그리고 두 번째로 물었을 때는 아둔한 나도 무언가를 눈치챘다. 아, 이 사람은 나를 어떤 비즈니스 목적으로 방문한 것으로 여기고 있구나. 예를 들면 보험 판매라든지 하는 거 말이다. 나는 서둘러 그 집을 나와버렸다. 대화를 나누면서도 끊임없이 내 방문의 목적을 헤아리느라 그녀가 얼마나 머리를 굴렸을 것인가. 그 생각을 하니 견딜 수 없이 내가 미워졌다. 아이러니한 것은 그 얼마 뒤에 그녀가 나를 방문했다는 것이다. 보험 판매를 위한 비즈니스 목적으로.
나는 그녀에게 크게 실망하였다. 나이 든 사람들 사이에서도 우정이 싹틀 수 있다는 가능성, 그런 것 자체를 모르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이후 그녀와는 얼굴을 봐도 가볍게 인사만 할 뿐 교류 없이 지냈다. 그런데 요즘 나는 그녀를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종종 나와 알고 지내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 가운데에는 내가 먼저 좋다고 한 걸음 다가선 사람들도 있다. 그런데 하나같이 그들에게 어떤 숨겨진 동기가 있다. 물건을 팔고 싶거나 후원이나 기부를 원하고 내가 원하지도 않는 어떤 모임으로 이끌려 한다. 내가 정작 그들의 관심과 다른 대화를 할라치면 무척 곤혹스러워한다. 어쩌면 내게 “오늘 왜 왔어?” 묻던 그녀는 세상 돌아가는 이치를 나보다 훨씬 먼저 깨친 것인지도 모른다.
“ 우정을 믿으세요?” 얼마 전에 차를 마시다가 내게 이렇게 물었던 사람이 있다. 그녀는 막 60대에 접어든 여자였고 나는 그녀의 말을 단박에 알아들었다. 속 얘기를 잘 하지 않는 사람이라 혼자 그녀의 처지를 머릿속으로 그려 보았다. 고향의 옛 친구들은 소중하나 멀리 있다. 안 보면 죽을 듯했던 친구들 몇은 배신하였고 몇은 사이가 흐지부지해진 지 오래다. 떼지어 만나는 동기는 많으나 깊은 얘기를 나누고 싶은 사람은 없다. 그나마 깊은 얘기를 나누던 친구도 사이가 조금 위태위태하다. 그녀에게도 다가가는 사람들이 꽤 있다. 나보다 더 많을 것이다. 나와 거의 닮은 꼴. 그녀에게 “취향이 같은 사람이라면 혹 가능할지 모르죠.”라고 했다. 답을 하는 내 마음이 다 헛헛했다.
이 글을 쓰고 있는데 지인이 감자를 한 상자나 가져왔다. 그녀가 직접 기른 것이라 더 소중한 감자였다. 그녀와는 2006년에 열댓 명이 상담 공부를 하던 모임에서 만났다. 하나둘씩 떨어져 나가 이제 셋이 남았다. 이들과 내 관계는 자녀 결혼식에 반드시 참석하는 사이, 라 정의하고 싶다. 이게 뭐 대수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나에겐 정말 대수로운 일이다. 나는 웬만해서는 부조금만 보낼 뿐 결혼식에 잘 참석하지 않는다.
사람이 만나고 헤어지는 일에 조금은 피로감을 느꼈던 나날이었다. 누군가를 향해 한 걸음 다가서기보다 이미 내 곁에 있는 이들에게 충실하겠노라 다짐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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