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려니<부부상담사>

새 종(鐘)이 만들어졌다. 그 종에 짐승의 피를 바르는 의식은 전통이었다. 이 의식에 쓰려고 끌고 가던 소가 눈물을 흘린다. 마침 왕이 이 모습을 목격한다. 왕은 소를 놓아주고 양을 가져오라고 했다. 이양역우(以洋易牛) 고사가 나온 유래다. 맹자는 왕의 이 결정을 측은지심으로 풀이하며 왕을 칭찬한다. 왕이 어진 마음을 가졌으니 백성을 아끼는 정치를 할 수 있다고 본 것이다.
여기서 누구나 의문이 든다. 그럼 소 대신 끌려가 제 피를 바쳐야 했던 양은 뭐지? 그때 왕이 할 수 있는 최선의 일은 그 의식을 폐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왕은 오랫동안 전통으로 내려온 그 의식을 없앨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다만 제 눈앞에서 울고 있는 소에게 연민을 느꼈을 뿐. 그래놓고 왕도 비슷하게 생각했던 모양이다. 그래서 ‘소 대신 끌려가 제 피를 바쳐야 했던 양은 뭐지? 라고 맹자에게 물었다. 맹자는 소는 눈으로 보았고 양은 보지 않았다는 차이가 있다고 했다. 눈으로 본 것을 더 측은하게 여기는 게 당연하다는 말이었다.
나는 어렸을 적 가끔 외할머니댁으로 보내졌다. 엄마가 돌봐야 할 아이들이 수두룩했기 때문이다. 어느 여름이었다. 방학을 맞아 외갓집에 간 날, 할머니는 저녁에 닭을 삶아주겠다고 했다. 나는 마음이 한껏 부풀어 올랐다. 닭들은 마당에서 활기차게 흙을 쪼았다. 나는 툇마루에 엉덩이를 걸치고 발을 까닥거렸다. 그러다가 닭들을 향해 기세 좋게 소리를 질렀다. 야, 너희들 이제 곧 죽어. 몇 살이었는지는 모르겠다. 혼자 시외버스를 타고 할머니 댁에 갈 정도의 나이라는 것만 안다. 목숨 붙은 것들에게 그렇게 말하는 거 아냐. 나는 할머니에게 혼났다. 어느 정도냐 하면 거의 저녁에 닭들이 처할 운명, 그 근처에 갈 만큼이었다. 나는 그때 닭을 ‘보고’ 만났어도 그것들의 운명에 관심이 없었다. 정말이지 눈꼽 만큼도 말이다. 그것들은 오직 내 먹잇감일 뿐이었다.
나보다 더한 사람도 있었다. 고향의 우리 집에는 너른 마당이 있었다. 할아버지가 개를 키웠는데 이름은 죄다 ‘벅구’였다. 이름이 어디에서 유래했는지는 잘 모르겠다. 그 전의 개도 벅구였고 그 전의 전도 매한가지였다. 우리는 마당에서 같이 뛰어놀았다. 그런데 벅구는 몇 번이나 감쪽같이 사라지곤 했다. 학교에서 돌아와 보면 눈에 띄지 않았다. 드디어 그 비밀을 알게 된 날이 왔다. 엄마가 할아버지가 잡아먹었다고 털어놓은 것이다. 그 배신감이라니. 산타클로스가 세상에 없다는 걸 안 만큼 충격이었다. 이후로 할아버지는 내게 키우던 벅구를 잡아먹은 이상한 노인네로 영원히 각인되었다.
이상한 일이다. 할머니도 키우던 닭을 잡아먹었고 할아버지도 키우던 개를 잡아먹었다. 그런데 어째서 내게는 두 분을 기억하는 상반된 상이 남아 있게 되었을까? 할머니는 내게 생명을 존중하라는 첫 가르침을 주신 분, 할아버지는 키우던 개도 날름 잡아먹는 인정머리 없는 분으로 남았다. 할머니는 이양역우의 왕이 희생 의식을 포기하지 않았던 것처럼 키운 닭을 잡아먹는 걸 꺼리지는 않았다. 다만 왕이 눈물 흘리는 소를 측은하게 여긴 것처럼 죽어갈 닭을 향한 연민이 있었다. 할아버지에게는 그게 없었다. 그게 차이였다.
요즘에는 ‘불쌍하다’라는 말도 금기시되는 경향이 있다. 나는 다르게 생각한다. 측은지심이야말로 문제 해결을 위한 좋은 출발점이다. 그리고 할머니와 나의 예에서 보듯 이것은 타고나는 것이 아니라 키워지는 것이다. 눈을 돌려 주위를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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