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명희<수필가>

  아름드리나무 꼭대기에 갈바람이 걸터앉았어. 높아진 하늘과 입맞춤하더니 실어 온 가을의 숨결을 슬쩍 풀어 놓더라. 아직은 느긋한 걸음이야. 마른 잎이 하나둘 떨어져도 그늘은 여전히 푸르거든. 처음엔 다 그래. 조심스러운 걸음으로 다가와 숨을 죽이고 있다가 때가 되면 벌떡 일어나 정체를 드러내지. 하지만 한창은 잠깐이야. 화려한 날은 너무도 급하게 저물거든. 갈바람의 입김에 매미의 울음이 잦아들어도 애써 모른 척하며 곁눈질로 가을을 맞이하는 중이야. 어차피 어찌할 수 없는 일이잖아.
  가끔 아무도 없는 엘리베이터 안에서 거울을 보며 춤을 추곤 해. 물론 근본 없는 막춤이야. 신기하게도 짧은 몸부림으로 가벼워지는 것을 느끼지. 시나브로 하루의 찌꺼기와 부정한 것을 털어내는 의식이 되었어. 온전한 쉼의 공간을 지키기 위한 나만의 굿이라고나 할까.
  춤은 곧 ‘흥’이라고 생각했어. 바짝 마른 풀숲에서 홀로 흐느적흐느적 춤을 추며 한 어머니가 등장하기 전까지는. 그녀의 작은 몸에 서린 귀기가 흘러나와 스크린을 덮었지. 무표정한 얼굴로 비틀고 털어내는 몸짓 하나하나가 무음의 메시지를 전하며 짓누르듯 압박해왔고 금세 나의 혼을 사로잡았어. 그녀의 이름은 ‘마더’야. 힘은 약해도 강해져야만 하는 어머니의 또 다른 이름이지. 내 이름이기도 하고.
  그녀는 참으로 지난한 삶을 살아왔어. 나아질 것 없는 삶은 현재 진행이며 끝 또한 기약이 없지. 지능이 낮은 아이를 홀로 키워오며 때로는 형벌이라고 생각했을 거야. 그녀에게 찾아온 특별한 아들은 축복이 아니라 저주라는 생각도 수없이 스쳤을 테고. 그럴 때마다 죄의식이 몰려와 그녀의 사랑을 집착으로 이끌었겠지. 자식을 위해서라면 기피 할 것도 부끄러워할 것도 없는 것이 모성애야. 냉담한 세상에서 홀로 견뎌온 그녀가 가장 두려워하고 견디기 힘든 것은 무엇일까. 아들도 자신처럼 끝없이 무시당하면서도 자신의 소리를 내지 못하고 살아가는 것이 아닐까.
  나는 준비된 엄마가 아니었어. 그러니 열 달의 기다림은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인지 몰라. 언제쯤 나의 반쪽 이상을 닮은 생명이 내 품을 파고들 것인지 미리 알고 기다릴 수 있었기 때문이지. 사랑은 생겨나고 자라고 꽃 피우고 열매 맺고 시들어 사라지는 자연처럼 흘러가. 내 아이를 지극정성으로 돌보는 것은 본능이야. 따라서 학습이 필요 없었지. 하지만 아이가 성장해 갈수록 부족한 나를 보게 되었어. 자신은 옆으로 걸으면서 자꾸 똑바로 걸으라고 호통치는 어미 게처럼 나는 넘지 못한 한계를 내 아이에게는 뛰어넘어야 한다고 강요했지.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난다.’ 지극히 단순하고 확실한 명제를 부정하면서 말이야.
  나는 여전히 결핍의 구멍이 숭숭 뚫려있는 불완전한 어미야. 아직도 내 결핍을 가리려는 욕심이 자식을 향한 사랑이라고 착각하기도 하지. 내 품을 파고들던 온기는 점점 멀어지고 있어. 거침없이 세상으로 나아가며 당차게 자신의 소리를 내기 시작했거든. 나의 부족함을 쏙 빼닮았어도 괜찮아. 자그마한 얼굴에 콧날은 나보다 훨씬 높고 날렵하며, 키는 10cm나 더 커. 그럼 됐지 뭐. 아무렴.
  나의 한창인 시절은 지나갔어. 화려한 날이 있었는지 없었는지 기억조차 없어. 하지만 아직 그대로인 것도 있지. 내 아이를 처음 안았을 때 시작된 사랑이야. 따뜻하게 번지는 숨결처럼, 달콤하게 퍼지는 숨소리처럼 지금도 촉촉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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