舊正連休(구정연휴)에 TV를 통해 남들 귀성행렬의 이모저모를 시청하노라니 나 같은 고령의 실향민은 望鄕(망향)의 희망마저 절망으로 阿侮低庸 그만 목구멍에서 울컥 피를 토할 것 같다. 同病相燐(동병상인)해온 벗들도 이젠 얼마 남지 않아 쓸쓸하다. 62년 전 귀성의 완행열차 기적에 벌써 학처럼 목을 뽑으시어 짐작으로 손 흔드시던 어머니의 모습은 꿈결에도 그려지지 않는다. 영영 아득한 저켠이다.
그래서 TV에서 자막처럼 스쳐 가는 먼지 속의 이정표가 오늘따라 야속하다. 그나마 그것이 그리움이며 위안이였는데.
불현듯 통일 베트남의 國父인 호찌민(胡志明志)의 理程標觀(이정표관)이 내 뇌리에 재생된다. 정겹고 쉬우면서 심오한 진리를 수혈하듯 깨닫게 한다.
높은 곳에 있지도 먼곳에 있지도 않다.
황제도 아니고 왕도 아니다.
그대는 그저 큰 길가에 서 있는
보잘것 없는 이정표.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바른 방향을 일러주어 길을 잃지 않게 한다.
아직 길 위에 서 있는 이들에게
얼마나 더 가야할지 알려준다.
그대의 노고가 가볍지 않으므로
사람들은 늘 그대를 기억하리라.
이정표의 역할은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바른 방향을 일러주어 길을 잃지 않게 함이며, 아직 길 위에 서있는 이들에게 얼마나 더 가야할지 알려주는것 일뿐, 황제도 아니고 왕도 아닌 보잘것 없는 자리에 지나지 않는다. 그럼에도 그대의 노고가 가볍지 않으므로 사람들은 늘 먼지 속의 그대를 기억하리라는 것이다.
진정 전적으로 맞는 말이다. 만약에 이정표 없는 길을 상상해 보면 금방 실감나게 될 일 아니랴. 막막하고 답답하고 내가 지금 어디쯤에 있는지도 모를 상황에서 당황한 나머지 좌절하기 십상이 아니겠는가.
이 나라의 선택된 정치인은 물론이요. 모든 사회의 지도층과 공직자들이 호찌민이 말하는 이정표가 되어 준다면 억척같이 통일 베트남이 실현 되었듯이, 우리도 남과 북이 서로 마음 비우고 본래의 단일민족으로 회귀하여 빨리 통일의 그 날이 올 것이 아니랴.
문제는 정치인이나 사회 지도층 그리고 모든 공직자가 보잘것 없는 이정표가 되는 것이다. 황제도 왕도 아니어야 한다. 쥐꼬리만한 권한이라도 마치 광야의 맹수들이 배설물로 자기영역 확장을 꾀하듯이 휘두르려는 악습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문득 떠오르는 윤두서(1668~?)의 옛시조 한 수 읊으며 완미하니 절로 마음이 편하다.
玉에 흙이 묻어 길가에 버렸으니
오는 이 가는 이 흙이라 하는고야
두어라 알 리 있을지니 흙인 듯이 있거라.
시사하는 바가 심장하다. 만약 玉石이 함께 있는 것으로 끝나 버리면 이 세상에는 善惡, 正邪, 眞假가 없어지고 말 것이다. 그러나 선이나 악은 어디까지나 구별이 되는 법이다. 즉 보석은 어둠 속에서도 빛이 나고, 향은 아무리 겹겹이 싸도 결국 그 냄새가 밖으로 나오게 마련인 이치와 같다.
사람 가운데서도 옥에 해당하는 자가 있는법, 이런 자들 골라 나라일을 맡길 줄 아는 이가 있어야 마땅하고, 옥과 같은 사람을 몰아내고 옥 아닌 자신만이 권력을 장악하려 드는 흙에 해당하는 무리는 없어야 할 것이다. 아니 알아주는 이가 없으면 어떤가? 옥은 옥으로서 족하면 되는 것이 아닌가? 그것이 옥이기 때문이다.
랄프 왈도 에머슨의 <무엇이 성공인가>라는 시 역시 어려움에 헤매게 하지 않아서 친근해진다.
자주, 그리고 많이 웃는 것
현명한 이에게서 존경을 받고
…
친구의 배반을 참아내는것
…
자기 자신이 태어나기 전보다 세상을 조금이라도 살기 좋은 곳으로 만들어 놓고 떠나는 것
자신이 한 때 이곳에 살았음으로 해서 단 한사람의 인생이라도 행복해지는 것 이것이 진정한 성공이다.
이렇듯이 진리 아니 내가 진정 할 일이 가까이에 있는 줄 몰랐으니 나는 지지리도 어리석다.
나 자신이 태어났음의 가치는 세상을 전보다 조금이라도 살기 좋은 곳으로 만들어 놓고 떠나는 것, 그리고 나로 하여 단 한사람의 인생이라도 행복해지는 것, 이것이 진정한 성공이란다. 그게 뭐 그다지도 어려우랴.
하기사 친구의 배반을 참아내는 일이 예사일이 아니다. 그래도 그것을 해내야 자주, 그리고 많이 웃을 수 있고 또 현명한 이에게서 존경을 받게 되니 이는 필수이지 선택이 아니다. 당장 실천해야겠다.
/이기진 논설주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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