뽀야니 피어오른 안개 속에서 동행을 청하는 듯 내 앞에 멈춰 선 유자효의 시 ‘아쉬움에 대하여’가 오늘따라 무척 정겹다.
정거장마다 서는 춘천행 완행열차를 타고/ 겨을 빛 속으로 떠났다/ 나의 청춘도 이렇게 늦게/ 정거장마다 서 가면서/ 나의 곁을 천천히 떠나 버렸다/ 그 뒤 나는 한번도 만나지 못했다/ 떠나간 나의 청춘, 나의 사랑, 나의 추억을/ 그들은 어디서 살고 있을까/ 그들도 나를 그리며 울고 있을까?/ 정거장마다 서는 춘천행 완행열차를 타고 겨울 빛 속으로 떠났다/ 떠난 뒤 소식없는 나의 청춘/ 그 그리운 시간을 찾아.
그러니 보니 내게도 약 50년쯤(1958) 전에 未堂(미당)선생의 칭찬을 받았던 자작시 ‘풍경화가 앉은 시골길’이 있었구나.
보리 익은 내음이/ 물씬물씬 食道에 풍겨드는 황톳길/ 여인의 솜털처럼/ 잔잔히 나부끼는 바람/태양의 자장가// 풀를 뜯다 말고 구름을 마시는/ 검정 염소의 기도/ 하늘을 간질으는 바람개비// 우렁이 기어간/ 못자리에/개구리의 부릅뜬/ 눈알이/ 숨을 헐떡거린다// 바지랑이가 짝짝이로 올라간/ 농부는 흙색 다리/자운영을 뒤엎어 논을 가는/ 황소의 억센 숨결/냇가의 푸른 언덕은 온통/빨래가 눈부시다.
그 당시 우리네의 숙명의 보리고개, 오죽했으면 필화로 유배간 거제의 명색이 지서장인 내가 길가에 서서 밭에서 익어가는 보리 내음으로 요기를 때웠을라구. 그래도 그런 가운데서도 결코 젊음과 낭만을 잃지 않았었다. 모두를 지탱해준 것은 꿈과 희망이었다. 이정표는 보이지 않았어도.
뉘라서 날 늙다든도 늙은이도 이러한가
꽃 보면 반갑고 잔 잡으면 웃음난다.
춘풍에 흩날리는 백발이야 낸들 어이 하리오
옛시조 한 가락 흥얼거리니 조금은 위안이 되는 것 같다. 늙었어도 낡아선 안되겠다는 이런 몸부림이 스스로 가상하다. 나 자신의 기능성에 대한 확신을 지니지 못하면 죄어드는 오뇌만 가중될 뿐, 결국 인생무대는 망가진다. 자학의 잔해를 물끄러미 바라본다는 건 더욱 무책임한 짓이라 잠시 자성하며 눈을 감는다.
이럴 때면 버릇처럼 거울 앞에 선다. 주름이 세력을 확장해 가는 내 얼굴에 일말의 서글픔이 없을 수 없다. 그래도 내가 나를 꾸짖기가 이젠 지겹다.
나는 하도 어이가 없어 그만 失笑(실소)하고 말았다. 그랬더니 신기하게도 웃을만한 일들이 다투어 몰려오는 것이 아닌가. 비로소 심한 사랑의 갈증에 목이 타고 있음을 깨달은 것이다. 동시에 남들의 갈증도 헤아려지고.
사랑! 그것은 상대를 향한 뜨거운 열정에 배려의 두가지 권능으로 마음의 평화와 직결되더라. 문득 늙어도 낡지 않는 비법은 이것 뿐인가 싶다. 맞다, 바로 이거야. 낡으면 곧 추해진다. 주변에 수두룩하다.
사람들은 보통 낙엽을 이파리의 죽음이라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현명한 이는 이파리의 완성이라고 자신있게 말한다.
웃는 얼굴은 얼마든지 조작할 수 있다. 그러나 진정으로 웃는 사람은 그다지 흔하지 않다. 무거운 짐을 지고 웃는다는 건 여간해선 어렵다. 나 자신이 무거운 짐을 벗어던지고 홀가분할 때 비로소 웃음이 밖으로 피어나더라. 요는 마음 비우기다. 특히 노욕은 추하니 삼가할지어다.
지난 날 유한양행의 창업주 유일한 박사는 자수성가한 전 재산을 그부를 이루게 해 준 사회에 환원했었다. 지금 그 회사에선 화장실 청소하는 아줌마도 어엿한 주주라 화장지 한 조각을 아낀다잖는가?
김활란 박사는 죽음에 이르러 “절대로 장송곡일랑 부르지 말고 승리의 노래를 불러달라”로 유언했었다. 자신만만하게 자기의 인생을 평가한 결과라고 여겨져 숙연하게 했었다. 그는 또 “죽을 각오 없이 겨레의 삶을 걱정하는 자리에 앉지 말라!”고 경고하기도 했었다. 따르지 않는 자들이 적잖아 문제다.
그 후임자인 김옥길 선생은 퇴임 후 저 문경새재 이화별장에서 기거하던 만추의 어느 새벽 산책길에 넘쳐흐르는 도랑물에 놀라, 살펴보니 간밤 쌓인 낙엽이 도랑을 막았기 때문임을 알았다. 손수 그걸 치우고는 ‘나는 결단코 물길을 막는 낙엽이 되지 말아야지’를 다짐했다지 않았던가. 항상 후진에게 길을 터주는 그 아량이 하냥 그립다. 나이 값의 진면목을 본다.
나는 오늘도 마음을 가다듬어 先人들의 모범을 따르려고 연습을 한다. 놀고 있는 마음처럼 따분한 게 또 어디 있을라구. 간사함도 오만함도 부지런히 마음 굴리기에 따라 조금씩 조금씩 마모되어 둥굴어지더라.
다시 사랑!!
그것은 구호나 이론이 아니다. ‘짧은 사랑의 한 마디와 친절한 작은 행위가 이 세상을 낙원으로 만든다’는 격언이 내 가슴 깊숙이에 큼직한 말뚝을 박는다. 그런데 아프지 않는 까닭은 깨달음의 희열 때문이리.
늙어도 낡지 않을 이 지름길 두고 어찌 어려운 생각들만 골라 하다가, 재활용 쓰레기로도 분류되지 못한다면 지지리도 못난이가 아니겠는가? 영락없이 왕따 감이다. 마음을 곱게 써야 해!
제발 이성을 사랑했던 젊은 날의 열정과 배려의 10분의 1만이라도 남을 위해 양보하고 또 베풀자구. 반대급부는 내 맘에 깃드는 은은한 평화의 종소리, 그걸로 족하다.
끝으로 나태주의 三行詩 ‘풀꽃’, 짧지만 그 긴 여운에 흠뻑 적고 싶다. 남이건 가족이건 건성으로 대하면 예쁘지도 사랑스럽지도 않더라.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
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
너도 그렇다
/ 이기진 논설주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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