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려니<부부상담사>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밤새 절여 둔 배추를 씻었다. 씻은 배추를 소쿠리에 올려 물기를 빼는 동안 김장 속을 만들 참이었다. 말끔히 닦인 알타리, 갓, 쪽파가 여기저기에 널려 있고 식탁위 바구니에는 무가 한가득 쌓여 있었다. 남편은 식탁에 앉아 무를 손질하고 있었다. 칼로 남아 있는 잔뿌리와 거친 부분을 자르고 상하거나 흙이 묻어 있는 곳을 도려냈다. 쌓인 일거리를 바라보다 한숨이 나왔다. 일단 커피를 한 잔 마셔야 일이 풀릴 거 같았다. 나는 남편에게 커피를 건네고 맞은편으로 가 앉았다.
커피를 홀짝거리며 할 일이라곤 없었다. 코앞에서 무 손질에 여념이 없는 남편을 관찰하는 것 밖에는. 곱슬곱슬한 머리에 안경을 낀 아직 탱탱한 피부의 낯익은 얼굴. 낯익은 얼굴, 하고 작게 소리 내 보았다. 문득 저 얼굴이 세상에서 내게 가장 낯익은 얼굴이 아닐까, 싶었다. 내 부모님과 아이들보다도 더 낯이 익은 얼굴이었다. 내가 가장 오래 보아왔기 때문이었다.
“여보, 자기가 세상에서 내게 가장 낯익은 사람이네.”
나름 달콤한 말을 날렸음에도 그에 상응하는 보상은 없었다. 이어폰을 꽂고 강좌를 듣던 남편은 눈만 몇 번 껌뻑이다 말았다.
수술을 하루 앞둔 오후에 아버지는 입원 수속을 마쳤다. 입원실에는 한 명의 보호자만 동반할 수 있다고 했다. 아버지는 가장 신뢰하는 아들과 함께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어머니가 엘리베이터 앞으로 바싹 다가섰다. 어머니는 엘리베이터 문이 닫힐 때까지 아버지에게 손을 흔들었다. 그 모습이 영 낯설었다. 나는 여태껏 닭과 지네처럼 지내는 부모님의 모습에 익숙했다. 어머니가 닭이었다. 젊은 날 어머니의 속을 무던히도 아프게 했던 아버지는 말년에 지네 신세를 면치 못했다. 그럴만하다며 어머니를 두둔하던 딸들은 어느 사이엔가 아버지의 편을 들고 있었다. 닭이 현저하게 우위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버지는 고향에서 폐암 진단을 받고 안산의 상급 병원에서 재차 진료받았다. 수술이 가능한지 보기 위해서였는데 다행히 결과가 좋았다. 일단 고향으로 돌아갔던 아버지는 수술 날이 임박해서 어머니와 함께 올라왔다. 치매 초기 증상을 보이는 어머니는 당분간 언니네 집에서 지내기로 했다. 그런데 어머니는 아버지가 폐암인 걸 모르고 있었다고 했다. 나는 아버지 포함누구도 어머니에게 사실을 알리지 않을 걸 몰랐다. 내가 무슨 말끝에 아버지가 ‘폐암’이라고 흘렸던 적이 있었나 보았다. 난 어머니가 모른다고 생각지 않았기에 아무 경계심이 없었다.
언니 말에 의하면 그때부터 어머니가 달라졌다고 했다.
어제 어머니는 수술 이후 처음으로 병문안을 왔다. 아버지가 휠체어를 타고 내려와서 어머니를 만났다고 했다. 그날 일일 보호자였던 동생의 말에 의하면 아버지가 이런 일은 처음이라며 만감이 교차한다고 했단다. 동생의 표현으로 ‘어머니가 아주 애틋하게 아버지에게 애교를 부렸기’ 때문이었다.
모두 이제라도 두 분이 사이가 좋아져서 다행이라고 했다. 나도 동의한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내 깊숙한 곳에서 뾰족뾰족한 마음이 고개를 쳐드는 것도 사실이다. 그 좋은 시절 다 흘려보내고 이제야… 진작에 지금처럼 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가장 ‘낯익은 얼굴’은 언제든 눈앞에서 사라질 수 있다는 걸, 진작에 알았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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